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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대구대교구 >  성 유스티노 신학교
[소개] [찾아가는길] [앨범사진] [자료실] [게시판]

간략설명 1914년 개교한 대구의 첫 신학교
지번주소 대구시 중구 남산 3동 219 
도로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명륜로12길 47
전화번호 (053)660-5100
팩스번호 (053)660-5120
홈페이지 http://www.cu.ac.kr
관련기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문화정보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3호
1914년 개교 이래 67명의 사제를 배출하고 1945년 폐교된 성 유스티노 신학교. 현재는 가운데 성당과 좌우의 교사 일부만이 남아 있다.1914년 10월 3일 대구에서 개교한 신학교. 개교 이래 67명의 사제를 배출하면서 교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5년 3월 19일 폐교되었다.
 
설립 과정  1911년 4월 8일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는 대구에 부임한 첫 주일(7월 2일)에 주교관 · 신학교 · 주교좌 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지면 루르드 동굴과 유사한 동굴을 세워 성모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때부터 신학교 설립은 교구의 가장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이 사업은 그 해 7월 5일 서상돈(徐相燉, 아우구스티노)이 주교관과 수녀원 부지를 기증함으로써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서상돈이 기증한 부지에 신학교를 건립하기로 하고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신학교 건립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에 드망즈 주교는 세계 각 지역에 재정 지원을 호소하였고, 그 결과 1912년 11월에는 성 유스티노를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5,000프랑을 기증받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교구에서는 1913년 9월 4일 신학교와 부속 성당의 기초공사를 시작하였으며, 공사가 진행 중인 1914년 5월 3일 드망즈 주교는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를 신학교 교장으로, 페셀(Peschel, 白鶴老) 신부를 신학교 교수로 임명하였다. 당시 교구에서는 그 해 9월 19일 학생을 선발하여 개교할 예정이었으나 공사가 예정보다 늦어짐에 따라 개교일이 연기되었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내부. 1915년 드망즈 주교가 축성한 성당 모습이 그대로 남아 세월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설립과 변모  드망즈 주교의 노력으로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학교 이름을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정하고, 첫 신입생으로 주재용 등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 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였다. 신학교의 학제는 용산 신학교와 같이 라틴어 교육 중심의 보통 교육 과정(소신학과 6년)과 철학 및 신학 과정(대신학과 6년)이었으며, 대신학과와 소신학과는 각각 2학급으로 구성되었고, 신입생은 3년마다 50명 내외를 선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2월 23일에 주재용이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의 첫 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3 · 1 운동이 일어나자 성 유스티노 신학생들은 3월 7일 교내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으며, 3월 9일에는 김구정(金九鼎, 이냐시오)과 서정도가 주동이 되어 미국의 윌슨(Wilson)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독립 선언문 복사 및 태극기를 제작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사실이 교장 신부에게 알려짐으로써 시위 계획은 무위로 끝났고, 그 결과 방학이 5월 1일로 앞당겨 실시되었다.
 
3 · 1 운동의 여파가 가라앉으면서 그 해 6월 13일 신학교 확장을 위한 계약을 체결한 드망즈 주교는, 1920년 1월 포교성성에서 2명의 신학생을 로마로 파견하라는 지시에 따라 송강정(宋康正, 안토니오)과 전 아우구스티노를 로마 우르바노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또한 1922년 9월에는 소신학과 입학을 준비하는 ‘예비반’을 신설하였으며, 이듬해 10월에는 달성군 성당동에 신학교 별장인 ‘성 니콜라오 별장’을 개설하여 신부와 신학생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정면의 성모상.1930년대 들어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대 · 소신학과의 분리라는 학제상의 변화를 맞게 되었다. 대 · 소신학과의 분리는 신학생들에게 일반 교양 과목을 가르침으로써 신학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1928년 말 서울 신학교에서 먼저 도입하였다. 그 결과 용산의 소신학생들은 1929년 9월부터 남대문상업학교(동성상업학교의 전신) 을조(乙組)로 편입되었고, 대구의 소신학생들은 1930년 12월 16일 드망즈 주교가 뮈텔 주교와 연합 소신학교 구성을 협의함에 따라 1931년부터 혜화동의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제 양성 교육 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40년대 들어 폐교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당시 한국 내의 신학교는 서울 · 대구 · 덕원 등에 3개가 있었는데, 이 중 정식으로 인가된 것은 1935년 2월에 인가된 덕원 신학교뿐이었다. 이에 용산 신학교는 총독부의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2년 2월 16일 폐교되었고,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폐교의 위협 속에 있다가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고 말았다.
 
그 후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신학과 학생 7명은 덕원 신학교로 전학하였고, 철학과 학생들은 1945년 2월 23일 ‘경성 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가 인가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공부하였으며, 부제품을 받은 4명은 대구교구 사제 휴양소에서 최민순(崔玟順, 요한) 신부의 지도로 수업을 받다가 1945년 12월 1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신학교의 건물과 부지는 1945년 3월 31일 일본군 제218 부대에 징발되었다. [출처 : 방상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7권]
 
20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4개 홀로 재정비해 개관한 성 유스티노 신학교 100주년 기념관의 옴니아홀(100주년관) 전경.1945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 이후, 1982년 47년 만에 선목신학대학으로 재개교해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아 사제 양성의 요람으로 거듭났다. 1985년 선목신학대학은 대구가톨릭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고, 1994년에는 효성여자대학교와 통합하면서 지금의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대구관구 대신학원)이 되었다.
 
옛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ㄷ자형 평면으로 중앙 성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었으며, 1층 전면에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사용되던 연속 아치가 있어서 툇간 역할을 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 건립을 위해 명동 성당을 지을 때 참여했던 프와넬(Victor Louis Poisnel, 朴道行) 신부를 초청하여 설계하고 공사는 중국인 벽돌공들이 담당했다.
 
1946년 당시 폐교 상태에 있던 신학교는 대건초급중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대건중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1991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이전해 오면서 전면으로 돌출되었던 양 날개가 철거되고 성당을 포함한 중앙 일부만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당은 1915년 드망즈 주교가 축성한 모습 그대로이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1990년 12월 15일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대구대교구는 2014년 5월 30일 남산동 대신학교 대성당에서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기존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 내부를 재정비해 유스티노홀(건축관), 드망즈홀(설립자관), 앗숨홀(문서관), 옴니아홀(100주년관) 등 4개 홀로 구성된 '성 유스티노 신학교 100주년 기념관' 개관식을 가졌다. [최종수정 2015년 11월 25일]

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 캠퍼스(신학대학) 전경.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중심으로 왼쪽에 본부동, 오른쪽에 학부동, 그 뒤에 연구동이 있고, 옛 신학교 뒤에 성당동이 자리하고 있다.

모바일용 요약 설명
1911년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 주교는 주교관 · 신학교 · 주교좌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지면 루르드 동굴과 유사한 동굴을 세워 성모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때부터 신학교 설립은 교구의 가장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상돈이 기증한 부지에 신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드망즈 주교는 세계 각지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고, 그 결과 1912년 성 유스티노를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5,000프랑을 기증받아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명명하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 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여 1918년 첫 출신 사제를 배출했습니다. 사제양성 교육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신학교는 일제에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었습니다. 신학교의 건물과 부지는 1945년 3월 31일 일본군 제218 부대에 징발되었습니다. 1982년 사제 양성을 위해 47년만에 선목신학대학으로 재개교한 후 1985년 대구가톨릭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고, 1994년에는 효성여자대학교와 통합하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대구관구 대신학원)이 되었습니다.

옛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ㄷ자형 평면으로 중앙 성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었으며, 1층 전면에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사용되던 연속 아치가 있어서 툇간 역할을 했습니다. 1946년 당시 폐교 상태에 있던 신학교는 대건초급중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대건중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1991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이전해 오면서 전면으로 돌출되었던 양 날개가 철거되고 성당을 포함한 중앙 일부만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신학교 건물은 1990년 12월 15일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4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기존 건물을 재정비해 '성 유스티노 신학교 100주년 기념관'을 개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