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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  황사평
[소개] [찾아가는길] [순교자] [제주교안] [순례길] [앨범사진] [자료실] [게시판]

간략설명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순교자들의 안식처
지번주소 제주도 제주시 화북2동 5662-1 
도로주소 제주도 제주시 기와5길 117-22
전화번호 (064)721-0146
팩스번호 (064)756-5531
홈페이지 http://www.diocesecheju.org
전자메일 catholic-cheju@hanmail.net
관련기관 제주교구청    (064)751-0145
관련주소 제주도 제주시 관덕로8길 14
순교자 묘역 앞 야외제대에서 본 황사평 전경.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을 계기로 100여 년에 걸친 천주교에 대한 박해 정책은 끝이 났지만 지방에서는 소규모의 박해 사건들이 빈발했다. 더욱이 어떤 사건은 공식 박해를 능가할 정도의 대규모로 진행되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辛丑敎案)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우를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신축교안이 일어난 1901년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지 15년이 지난 때였고, 가톨릭 선교사가 제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전교 활동을 시작한지 채 2년이 못 된 때였다. 1899년 5월 제주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였다.
 
이듬해 초 페네 신부가 본토로 전출되고 그 후임으로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부임했다. 김원영 신부는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의 한논(大沓)에 정착해 새 본당을 설립하고 전교에 매진했다. 그 결과 교안 발발 직전 제주의 교세는 2개 본당에 교우 241명, 예비신자 620명으로 늘어났다. 신축교안이 벌어진 직후인 1901년 5월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추가로 파견되었다.
 
황사평 순교자 묘역에는 제주 신축교안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다.이 무렵 제주에는 봉세관(封稅官)이라는 제도에 대한 도민들의 원성이 높아 가고 있었다. 봉세관이란 1900년에 신설된 세제로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 민초들로부터 세금을 더욱 악랄하게 거두어들이기 위한 제도였다.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은 해당 지방의 백성들로부터 온갖 잡세를 거두어들여 지방 토착세력과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지방의 토착 관료들과 제주에 진출해서 어업 이권을 쥐고 있던 일본인 밀어업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이 달려 있던 이 문제를 둘러싸고 봉세관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했다. 이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당시 민중들의 불만을 천주교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돌림으로써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킨 제주 신축교안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렇듯 신축교안은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되어 중앙 정부의 가혹한 조세 정책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을 선동해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황사평 순교자 묘역 기념비 오른쪽으로 제주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저항을 물리치고 봉세관과 천주교회가 있던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다. 특히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 광장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다. 교회에서는 대체로 500-700명 정도의 신자가 피살된 것으로 보았으나 당시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된다.
 
당시 제주 지역의 선교를 맡았던 라크루(Lacrouts) 신부는 중국 상해에 있는 프랑스 함대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관덕정에는 시체들이 즐비했었다. 1901년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찍은 사진에는 교우들을 때려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시신 옆에 함께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신축교안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別刀峯)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했고,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가고 무연고 시신들만 남게 되었다. 1902년 8월 제주를 방문한 뮈텔(Mutel) 주교는 매장지 확보를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프랑스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 과정에서 피살자의 묘지인 영장지(營葬地) 문제가 1903년 11월 17일 최종 타결되어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황사평으로 이장한 무연고 묘와 시신의 수는 합장한 묘를 합해 총 26기에 28구였다.
 
1998년 제막식을 가진 제주도 출신 첫 신자인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비.황사평은 총 면적이 약 18,000평으로 현재 신축교안 당시의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제주교구의 공동 안장지로도 사용하고 있다. 1980년 황사평 교회묘지를 공원묘지로 공사하면서 울타리 석축공사와 성상들을 건립하고 순교자들의 묘를 평장으로 이장했다가 1995년 11월 제주교구 선교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28구의 유해를 합장하여 순교자 묘역을 새 단장하고 성역화했다. 또한 교구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여 초대 교구장인 현 헤롤드 대주교와 서귀포 본당 주임신부였던 나 토마스 신부의 유해를 성직자 묘지에 이장했다.
 
1998년 9월 20일 황사평 순교자 묘역 한편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 내에 그동안 이역만리 제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복음을 씨앗을 뿌리는데 큰 몫을 담당했던 파리 외방전교회 및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성직자들의 업적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 1899년 공식적으로 선교사가 파견된 이후 100여 년 동안 제주도에는 55명의 외국인 사제들이 들어와 사목했다. 그중에서 이미 선종한 16명의 명단이 공덕비에 새겨졌다.
 
1998년 9월 27일 우천으로 한 주 연기되어 황사평에서 거행된 순교자 현양대회 중 제주도 출신 최초의 신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비 제막식이 있었다. 제주교구는 그동안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최양업 신부 서한 등 사료들을 토대로 병인박해 중에 체포되어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에 순교한 김기량의 시복시성 운동에 불을 지펴왔었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됨으로써 그 열매를 맺었다.
 
복자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는 1816년 제주 함덕리(현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된 김기량은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인 이 바울리노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1857년 5월 31일 루세이유(Rousseille)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제주교구는 황사평 순교자 묘역 한편에 납골당을 조성하여 추모공원을 조성하였다.귀국 직후 김기량은 페롱(Feron)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났는데, 이때 신부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그는 제주로 돌아와 가족과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제주의 복음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여느 때처럼 무역을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통영 관아로 끌려간 김기량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켰다. 혹독한 매질을 당한 후 1867년 1월 동료들과 함께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관장이 특별히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1997년 ‘신축교안’을 재조명하기 위해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는 제주교구는 2003년 11월 7일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와 함께 화해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100년 동안 평행선을 달려왔던 양측이 과거사를 새롭게 정리하고 화해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화해 선언문 발표로 교회는 과거 전통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교활동을 펼쳤던 점들을 인정하고, 제주도 민중들도 봉기 과정에서 무고한 천주교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과거사에 대한 일방적 시각을 버리고 해묵은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제주교구는 2008년 황사평 순교자 묘역 앞에 납골당 건설 작업에 착수해 아름다운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1월 8일)]
 
 
황사평 - 신축 교안의 순교자 묘역
 
순교자 묘역으로 이어지는 중앙 통로에 성가정상이 세워져 있다.1901년 5월 5일, 제주도 남쪽의 대정 지역에서는 '상무사'(商務社) 회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여 난행하기 시작하였다. 상무사는 지역민들이 설립한 사설 단체로 천주교 세력이 퍼져 나가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던 터에 부당한 세금, 지방민과 교인들의 알력, 서양과 일본 세력의 제주도 진출 등이 문제가 되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키려고 하였다. 제주의 신축 교안(辛丑敎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박해 이후 한 명의 신자도 없던 제주에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1898년 4월 22일 '제주 본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프랑스 선교사 페네(Peynet, 배)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제주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페네 신부는 육지로 전임되고 라크루 신부가 새로 부임하였으며, 김 신부는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의 한논(大沓)에 정착함으로써 새 본당을 설립하였다. 김원영 신부의 활동은 실로 눈부셨다. 그의 전교 덕택에 교안 발발 직전까지 제주의 교세는 2개 본당에 신자 수 241명, 예비신자 수 62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교안은 5월 5일부터 6월 초까지 20여 일 계속되었다. 처음 상무 사원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라크루 신부와 김원영 신부는 피정차 육지에 나와 있었으므로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한편 뮈텔 주교는 피정 중에 인사 이동을 결정하여 김원영 신부를 육지에 남기는 대신 무세(Mousset, 문) 신부를 한논 본당에 임명하였다. 5월 10일 라크루 신부와 무세 신부는 제주에 들어가 제주성에 갇혀 있는 신자들과 생사를 함께하였으며, 5월 28일에는 제주성이 난민들에게 함락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학살되었다.
 
십자가의 길 너머로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폭도들은 그들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끌어내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여자 교우들의 새로운 학살 소식과 화재 소식이 도처에서 들려왔습니다. 김원영 신부의 회장인 박 고스마는 묶인 채 매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 그 곳에 저의 복사 아우구스티노가 있다가 도망쳐 왔습니다. 동헌 마당으로부터 거친 소리들이 들려왔고, '천주교 아이놈은 어디에 있느냐?'는 외침도 들렸습니다. 벽장에 숨어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마침내 폭도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아, 하느님, 제 아이가 잡혔습니다. 그는 고문을 당했고, 폭도들은 그 아이의 빰에 총을 들이대고 여러 차례 발포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시여 … 예수님, 성모님 …."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여 살해되었습니다(라크루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01년 6월 11일자 서한).
 
교안의 결과 천주교 신자와 예비신자 중에서 약 300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기록의 미비로 신자와 비신자, 순교자와 단순 희생자를 규명해 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라크루 신부의 다음 기록을 빌리면, 복사 신재순(아우구스티노)과 같은 경우에는 신앙 증거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18세의 젊은이로 순진하고 양식을 갖춘 가톨릭 신자였고, 천사와 같은 삶을 살았으며, 헌신적이었고, 그 밖에도 많은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위의 서한 참조).
 
황사평에는 교우들의 묘 뒤에 신축교안 순교자들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뒤 교안 희생자들의 시신은 관덕정 앞에 모아졌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가족들이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 때 연고가 없는 시신들은 5월 말에 일단 사라봉(제주시 화북동) 아래에 묻혔다가 2년이 지난 1903년 4월에 매장지가 황사평(당시 화북 2동의 황새왓)으로 결정되면서 모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제주 신자들은 황사평을 순교자 묘역으로 생각하여 해마다 현양 행사를 개최해 왔으며, 1995년에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한곳에 모은 합장묘를 조성하면서 묘역을 새로 단장하여 순교 사적지로 가꾸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000년 3월호]

납골 추모공원.

모바일용 요약 설명
1901년 제주에서 발생한 신축교안은 1900년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이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잡세를 거두는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습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습니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신축교안은 유서 깊은 관덕정 앞을 사형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는데,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교우들의 시신은 별도봉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1903년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했습니다. 이때 황사평으로 이장한 무연고 묘와 시신의 수는 합장한 묘를 합해 총 26기에 28구였습니다.

총 면적이 약 18,000평의 황사평은 현재 신축교안 순교자 묘역뿐만 아니라 제주교구의 공동 안장지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1980년 순교자들의 묘를 평장으로 이장했다가 1995년 11월 제주교구 선교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28구의 유해를 합장하여 순교자 묘역을 새 단장하고 교구 성직자 묘지를 조성했습니다. 1998년 제주에서 활동한 외국인 성직자들을 기리는 공덕비와 제주 출신 최초의 신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비를 세웠습니다. 2008년 제주교구는 황사평 순교자 묘역 앞에 납골당 건설 작업에 착수해 아름다운 추모공원을 조성했습니다.
미사시간
미사구분 요일 시간 기타사항
주일미사 06:30  미사 일정은 인근 동광 성당(064-721-9911) 것입니다.
09:30  
11:30  교중미사
19:30  
평일미사 06:30  
19:30  
10:00  
19:30  
06:30  
10:00  
19:30  
06:30  
19:30  특전미사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