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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직제도 ◆   
한자 假聖職制度
출처 : [가톨릭대사전]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聖務)를 집행했던 제도.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인 1786년부터 1787년경까지 이승훈(李承勳, 베드로), 권일신(權日身,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홍낙민(洪樂敏, 루가) 등 10여명의 지도급인물들이 약 2년간 신품(神品)을 안받은 채 사제(신부)로서 미사성제(聖祭)를 드리고 고해(告解) 등 각종 성사(聖事)를 집전하였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北京)에서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래 그를 북경으로 가게 했던 남인(南人) 학자 이벽(李檗, 세자 요한)을 중심으로 권일신, 정약전(丁若銓) ·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 정약용(丁若鏞, 요한) 3형제, 이존창(李存昌, 별명 단원, 곤자가의 루도비코), 홍낙민, 유항검,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등 양반 및 중인신분 사람들이 차례로 입교함으로써 창설된 한국 교회는 처음 서울 명례방(明禮坊)[지금의 乙支路 2가]에 있던 김범우의 집을 집회장소로 삼아 주일축일을 지내왔으나 그 때까지는 아직 이런 제도는 실시되지 않았다.

   이 제도는 1785년 일어난 박해 즉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으로 김범우가 유배되어 순교하고, 주도 인물이었던 이벽이 타의로나마 은거케 된 뒤, 북경에가서 직접 성직자들의 성사 집행광경을 보고 온 이승훈에 의해 교회발전책으로 제의되어 채택되었다. 그러나 유항검교리서(敎理書)를 자세히 연구하여 본 결과 신부의 자격과 신부를 임명한 것이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하여 큰 의심을 품게 되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주교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이 편지는 이승훈권일신의 이름으로 씌어져 1789년 10월(음),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을 통해 북경의 북당(北堂) 선교사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승훈 등은 1790년 윤유일로부터 북당 선교사들의 회답을 받을 수 있었다. 이회답에서 선교사들은 성사를 마구 집전한 것을 무지로 돌리고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한 통회로써 구원을 얻도록 노력할 것이고, 구원의 가장 확실한 길은 성직자를 영입하는 것이므로 그 조속한 실현을 권고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평신도들은 신품성사를 받은 성직자교회에 필요함을 비로소 인식하고 북경교회에 선교사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윤유일을 다시 밀사(密使)로 북경에 파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社, 上·中·下, 분도출판사, 1979∼1980.